아가도포이에오(선행하다) vs 카코포이에오 (악행하다) 🪟
누가복음 6:9: 두가지 법의 행위;
"예슈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생명을 멸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가 주신 법의 참뜻에 따라 순종하는 선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는 행위입니다.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 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진실한 믿음없이 법을 이용하여 타인은 정죄하고 자신은 의롭게 여기는 악행
법을 왜곡하여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타인을 정죄하는 위선적 행위입니다.
롬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롬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롬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롬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롬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롬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위에서 나누어진 두 가지 법의 행위 중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행에 해당합니다.
이는 세상의 부귀영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천국을 향한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오직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이러한 믿음을 가능하게 합니다. (죄를 사하고 의롭게)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 율법의 저주와 그리스도의 구속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는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할 때 내려지는 정죄와 사망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저주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이 영원한 복과 성령의 약속을 누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율법이 선언한 저주의 결론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심으로, 이제 믿는 자는 율법의 저주 아래가 아니라 복과 약속 아래에 서게 되었습니다.
2. 율법의 목적과 저주의 역할
로마서 7:7-12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죄를 극도로 죄 되게 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게 합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거룩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정죄하며 저주를 드러내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율법은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을 깨닫고, 스스로가 아니라 메시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인해 연약하여 할 수 없던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보내어, 육신에서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밝히 보여 주지만, 죄를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율법이 지적한 죄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신 사건입니다. 율법이 “이것이 죄다”라고 선언했다면, 예수님은 그 죄를 실제로 짊어지시고 심판을 끝내셨습니다.
3. 어둠은 죄악 세상이고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5
“빛이 어둠 속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율법의 저주는 죄와 사망이라는 영적 어둠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어둠이 드러날수록,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얼마나 필요하고 절대적인 분이신지가 선명해집니다.
율법의 정죄와 저주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죄와 그 결과인 사망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와 사망의 법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죄와 사망의 법을 완성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메시아 예슈아 한 분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와 사망의 법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법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의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부활, 승천까지 모두 포함된 하나님의 구속 사역 안에서만 충족됩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시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온 땅에 펼쳐져 땅끝까지 이르게 됩니다.
4. 영원한 복을 주시기 위한 계획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율법은 스스로 끝나 버린 제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율법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 방향이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이 보여 준 거룩함, 죄의 심각성, 의의 기준이 모두 예수님 안에서 실체로 드러난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3-34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이 약속은 돌판에 새겨진 율법의 외적인 정죄를 넘어서, 예수님의 복음으로 주어진 새 언약을 통해 마음에 기록되는 율법을 예고합니다. 율법의 요구는 여전히 거룩하지만, 그 요구를 이루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바깥에서 강제로 누르는 율법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율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약속과 영원한 복을 받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1. 성경에 없는 개념으로서의 ‘율법주의’
‘율법주의’라는 말은 성경 원문에 존재하지 않는, 후대에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이 용어는 보통 율법을 문자적으로 따르려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낙인찍을 때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사용은 율법, 곧 토라의 본래 의도와 가치를 훼손할 위험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은 율법을 사랑하고, 지키고, 밤낮으로 묵상하는 것이 기쁨과 생명으로 이어진다고 증언합니다. 토라는 억압을 위한 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율법주의’라는 단어로 율법에 대한 열심 자체를 폄하하거나 부정적으로 규정해 버리면, 토라가 가진 참된 영광과 아름다움이 가려지게 됩니다.
2. 타락한 인간의 해석에서 비롯된 왜곡
오늘날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사용하는 ‘율법주의’ 개념은 종종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왜곡입니다. 바울은 결코 율법 자체를 부정한 적이 없으며, 율법의 목적과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그 율법이 예슈아 메시아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라는 용어가 잘못 사용될 때, 사람들은 율법 그 자체를 무조건 부정적이고 버려야 할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토라가 타락한 인간의 해석 속에서 왜곡되고, 율법을 통해 드러나야 할 죄 인식, 회개, 그리고 메시아 예슈아를 향한 갈망까지 함께 약화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1. 성경적 맥락의 왜곡
“율법에서 해방”이라는 표현은 주로 로마서 7:6, 갈라디아서 3:13과 같은 구절을 충분한 맥락 없이 단순화한 데서 나온 오해입니다. 바울이 말한 자유는 율법 자체로부터의 분리나 탈출이 아니라, 율법이 드러내는 정죄와 죄의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슈아 메시아를 통해 신자는 율법의 저주, 곧 정죄와 사망의 판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율법의 본질적 가치와 목적이 폐지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로마서 8:4에서 바울은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고 밝히며, 성령 안에서 율법의 참된 의가 신자들 안에서 성취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율법에서 해방”이라는 표현을, “이제 율법과 아무 상관 없이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왜곡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율법을 버리는 자유가 아니라, 정죄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율법의 본질을 이루는 자유입니다.
2. 율법의 지속적 역할
성경 전체를 보면 율법, 곧 토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지침으로서, 신자의 삶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슈아 메시아께서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 율법은 폐기된 쓰레기가 아니라, 새 언약 안에서 성령을 통해 마음에 기록되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해방”이라는 표현을, 율법 자체와의 단절이나 폐기를 의미하는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인 표현이 아닐 뿐 아니라, 예슈아 메시아와 바울의 가르침과도 충돌합니다. 신자는 율법의 저주와 정죄에서 해방되었지만, 동시에 성령 안에서 율법의 요구와 본질을 살아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율법의 참된 역할과 의미를 분명히 알리려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결국 예슈아 메시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율법의 본질을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로마서 7:7, 로마서 8:3-4).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와 신학은 바울의 말을 단순한 구호로 축소하거나, 인간적인 사고와 체계를 덧붙여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 결과, 바울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율법은 이제 필요 없다”,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태도는 잘못이다”와 같은 왜곡된 메시지가 퍼지게 되었습니다.
결론
“율법주의”나 “율법에서 해방” 같은 표현은 성경 원문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후대의 용어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자칫 성경의 본래 의도를 흐리게 하거나, 율법(토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율법을 버리거나 벗어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이 예슈아 메시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고, 이제 성령 안에서 그 본질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예슈아 메시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율법의 참된 의미와 요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애매한 용어에 의존하기보다, 성경이 실제로 사용하는 표현과 맥락을 깊이 묵상하며,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의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길입니다.